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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에서 가을을 느끼고자 사천향교를 찾다

하나모자란천사 2018. 11. 9. 08:44

10월은 행사의 달이다. 이달에만 결혼식장을 네 번 다녀왔다. 10월의 마지막 주말인 오늘 도 결혼식장 두 곳을 다녀와야 한다. 뭘 해도 좋은 계절이다. 때문에 행사도 많다. 사천시에도 10월의 마지막 주말에 큰 행사가 몰렸다. 하나는 '사천에어쇼'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한마당축제'이다. 이번 주말은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결혼식장 두 곳을 다녀와야 하고, 사천에어쇼와 농업한마당 축제도 다녀와야 한다. 토요일 오전 개인적인 일정을 하나 처리하고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사천읍으로 장소를 옮겼다. 결혼식이 시작하기까지 약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뭘 할까 잠시 망설이다가 산책을 하면서 가을을 느끼고 싶었다. 산과 들은 짙은 가을이지만 아직 도심은 가을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많았다. 멀리 이동하지 않고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디 없을까?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곳이 '사천향교'였다. 오늘이 두 번째 방문이다. 도심에서 옛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지만 사천에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었다. 가을을 느끼고 싶었는데 제대로다.



무엇이든 처음 한 번이 어렵고 힘들다. 두 번째는 처음보다 쉽고 그다음부터는 더 쉽다. 이제 좀 더 자주 이곳을 방문할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가끔씩 옛것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이곳에 들리면 옛것의 정취를 늘낄 수 있어 좋다. 위로가 되는 느낌이다. 사천향교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이 바로 이 돌길이다. 불규칙 속에서 규칙이 느껴진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오늘도 내일도 내다보지 못하고 불규칙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인생이 죽음이라는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흘러가는 것처럼.



사천향교의 정문이다. 옛것에 대한 정취 때문에 흑백사진으로 바꾸어 보았다. 지난번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출입문이 닫혀 있어 향교 내부를 둘러보지 못했다. 다행히 오늘은 문이 열려 있다. 



우측 사천향교 현판을 지나 출입문을 들어서면 돌계단이 이어진다. 지금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아주 가끔 저 문턱을 넘나들겠지만 예전에는 하루에도 수십 명이 이곳을 넘나들었을 것이다.



향교와 서원을 정확하게 구분 짓는 기준이 무엇일까?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향교가 제사와 교육을 위한 기관이라고 알고 있다. 향교에 들리니 그와 관련된 것들이 생각나면서 궁금한 것들이 생겼다. 순간 알쓸신잡을 떠 올렸다. 그들이 있었다면... 아니면 해설사와 함께 했다면 물어보고 싶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령을 내렸다. 왜 그랬을까? 서원이 본래의 의미와 달리 변질되어 악용되었기에 서원철폐령을 내린 것으로 아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나중에 찾아봐야지.


 향교


향교는 고려·조선시대 유교 교육을 위해 지방에 설립한 관학교육기관으로 '교궁' 또는 '재궁'이라고도 하였다. 수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 관학이 설치된 것은 고려 이후로서 1127년(인종 5)에 인종이 여러 주에 학교를 세우도록 조서를 내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부터 향교가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향교에 적극적인 유학 교육의 면모가 나타난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교화정책 가운데 근본적인 방법으로 지방민을 교육, 교화할 학교의 설립을 추진하였다. 1392년(태조 1) 각 도의 안렴사에 명하여 향교가 만들어지고, 또 잘 운영되는 정도를 가지고 지방관 평가의 기준을 삼는 등 강력한 진흥정책에 힘입어 성종 때는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설치되었다.


향교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배우는 공간으로서 강학 장소인 명륜당이 맨 앞에 배치되고, 그 좌우로 지금 기숙사와 같이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뒤에는 공자와 선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제례를 위한 대성전이 위치하고 대성전 좌우로 동무와 서무가 마주하고 있다. 명륜당, 동무, 서무 및 대성전 주위로 성현 제사와 유생 교육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처리하던 건물들이 위치하고 있다.


교생의 정원은 부·대도호부·목에 50명, 도호부에 40명, 군에 30명, 현에 15명으로 배당되었으나, 조선시대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각각 90명·70명·50명·30명으로 증원되어 말기까지 유지되었다.


교수관으로는 교수(종6품)와 훈도(종9품)를 두어 교육을 맡아보게 하고 8도의 지방장관인 관찰사로 하여금 이를 감독하게 하였다. 그리고 교생이 독서하는 일과를 매월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각 향교를 돌아다니며 교생을 독려하였다.


향교의 재정은 조선 초부터 향교에 주어진 위토 전답에서 거두는 세 외에도 지방관이 나누어준 전곡 및 요역, 그리고 향교에 비축된 전곡의 이자로 충당되었다. 《대전속록》 학전조에는 성균관을 비롯한 주·부·군·현 등에 각각 400결·10결·7결·5결씩을 지급하여 이를 농민에게 소작하게 하고 소작료를 받아 재정수요를 충당하도록 하였다.


중기 이후 향교는 점차 무력화되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은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사학인 서원이 거의 대치하게 되었고, 향교는 지방 양민들이 군역을 피역하는 장소로 전락하였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과거제도의 폐지와 함께 향교는 이름만 남게 되고 단지 문묘에 대한 제사만을 담당하게 되었다. 오늘날 지방을 다니다 보면 옛 향교가 문화재로서의 기능 외에 쓸쓸한 모습만 보이고 있다.


 서원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이다. 서원은 선현을 모시고 유생들을 교육시킨다는 점에서 성균관, 향교와 성격이 같다. 그러나 관학이 아닌 사학이라는 점과, 중국 선현은 배향하지 않고 우리나라의 선현만을 배향했다는 점에서 성균관, 향교와 크게 다르다.


풍기에서 부석사로 가는 길. 사과밭 속에 울창한 솔숲이 보인다. 소수서원은 그 속에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는 곳으로 현재는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수서원은 1542년 당시 풍기군수였던 주세붕이 유학자 안향을 기려 서원을 세우고 백운동서원이라 불렀다가 이후 1550년에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정에 청해 나라로부터 책과 노비 논밭을 하사 받고 부역과 세금을 면제받게 하였다. 이로 인해 소수서원이 최초의 사액 서원이 된 것이다.


이후 서원의 설치는 전국에 미쳐 명종 이전에 설립된 것이 29개,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했던 숙종 때 설치한 것만 300여 개소에 이르러 1도에 80∼90개의 서원이 세워졌으며, 초기의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향현을 제사 지내며 유교적 향촌 질서를 유지, 시정(時政)을 비판하는 사림의 공론을 형성하는 구실을 하는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증설되어감에 따라 혈연·지연 관계나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지방 양반층(사림)의 이익 집단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고 사액서원의 경우 부속된 토지는 면세되고, 노비는 면역되기 때문에 양민의 투탁(投託)을 유인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때문에 서원은 양민이 원노(院奴)가 되어 군역을 기피하는 곳이 되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군정의 부족을 초래하였고 불량 유생의 협잡 소굴이 되는가 하면 서원 세력을 배경으로 수령을 좌우하는 등 작폐도 많았다. 또한 면세의 특권을 남용한 서원전의 증가로 국고 수입을 감퇴시켰으며, 유생은 관학인 향교를 외면, 서원에 들어가 붕당에 가담하여 당쟁에 빠져 향교의 쇠퇴를 가속시켰다.


서원의 폐단에 대한 논란은 인조 이후 꾸준히 있었으나 특권 계급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손을 대지 못하고 1657년(효종 8) 서필원은 서원의 폐단을 논하다가 파직되기도 하였다. 효종·숙종 때는 사액에 대한 통제를 가하고 누설자를 처벌하는 규정까지 두었으나 잦은 정권 교체로 오히려 증설되었다.


1738년(영조 14) 안동 김상헌의 원향(院享)을 철폐한 것을 시발로 대대적인 서원 정비에 들어가 200여 개소를 철폐하였으나 그래도 700여 개소나 남아 있었으며 이 중 송시열의 원향이 36개소나 되어 가장 많았고, 유명한 것으로는 도산서원·송악서원·화양서원·만동묘 등이 있었다. 1864년(고종 1)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서원에 대한 일체의 특권을 철폐하여, 서원의 설치를 엄금하고 그 이듬해 5월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만동묘와 화양서원을 폐쇄한 이후 적극적으로 서원의 정비를 단행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향교에 들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누군가 뒤에서 출입문을 닫아 버리고 내가 향교에 갇히는 생각을 했다. 뒤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없다. 그냥 엉뚱한 생각이다. 느낌을 잘 살렸으면 판타지 소설을 쓸 수 있었을 텐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런 모습이 좋다. 이곳 향교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바로 뒤편으로 아파트가 보인다. 이런 곳이 좋다. 유럽에서는 이런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옛것을 너무 쉽게 버리는 경향이 있다.



계단에 올라서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보이는 단상과 정면에는 대성문이라는 또 다른 출입문과 좌/우로 각각의 건물이 있다. 각 건물의 기능이 다를 것 같은데 그 의미가 궁금하다. 



다시 보니 제사를 지내는 단상으로 보이는 이곳에 누군가 그릇 위에 정한수로 보이는 물을 올려다 놓았다. 이곳에 제사를 지내는 단상이 맞는 것 같다. 갑자기 두 가지가 궁금했다. 누가 이곳에 정한수를 올려놓은 것일까? 이곳에서 누구에게 어떤 기도를 올리는 것일까? 누가 어떤 소원을 빌면서 둔 것인지 모르지만, 간절하다면 이루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대성문 계단으로 오르다 보니 오른쪽 건물의 굴뚝이 보인다. 우리나라 한옥 건물은 굴뚝이 참 예쁘다. 예전에는 쉽게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쉽게 볼 수 없다. 굴뚝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건축 예술이다. 가끔 옛 한옥 건물을 구경할 때면 꼭 굴뚝을 살펴본다.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고, 같은 지역에서도 가풍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돌계단 아래에서 대성문을 올려다보았다. 저 문을 넘어서면 크게 성공하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도 그 기회를 얻고 싶은데 문이 굳게 닫혀 있다.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대성문 앞에 오르면 흙담이 눈에 띈다. 오늘날 같은 사각형의 정형화된 돌이 아니라 길가에 굴러다니는 자연 그대로의 돌을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활용했다. 예전에는 그랬다. 선조들의 건축물을 보면 삶에 대한 여유가 느껴진다. 삶을 모나게 살지 않고 둥글둥글 살았다는 느낌이다. 지금 우리의 삶과 비교가 된다. 지금 우리의 삶은 풍요 속 빈곤이다. 물질적으로는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빈곤한 삶이다. 모나게 살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대성문 앞에서 향교를 내려다본다. 이 풍경이 나는 좋다. 과거와 현재의 공존하는 모습. 지금부터라도 온고지신을 생각하고 옛 것을 버리지 않고 잘 살릴 수 있는 그런 정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햇살도 따사롭고 하늘도 좋아서 조용히 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갑자기 요란한 굉음이 하늘에서 들려왔다. 이때가 사천에어쇼 기간이라 블랙이글스의 곡예비행이 펼쳐지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블랙이글스의 곡예비행을 감상했다.



잠시 정신줄을 놓고 블랙이글스의 곡예비행을 감상하는 사이에 결혼식 시간이 다 되었다. 늦었다. 급하게 향교를 빠져나왔다. 이곳을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웠다. 다시 향교 정문의 돌길에서 사진을 찍는다. 조금 늦더라도 이 길을 천천히 거닐었다.



아쉬웠다. 천천히 이곳에서 가을을 느끼고 싶었는데, 다른 일정 때문에 충분히 가을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충분했다면 향교의 돌계단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책도 읽고 사진도 더 찍고 싶었다. 가을을 좀 더 느끼고 싶다면 향교 뒷산에 올라 단풍도 구경하고, 아니면 이곳에서 멀지 않은 수양공원에 올라 노랗게 물든 단풍이라도 구경했을 것이다. 도심에서 멀지 벗어나지 않고 가을을 느끼고 싶다면 사천향교를 둘러보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