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에서 사진작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아침 해뜨기 전의 여명과 저녁 해지기 전의 황혼이라고 한다. 이때는 태양이 대지를 비추는 각도가 비스듬하기 때문에 피사체의 윤곽이 뚜렷해지고, 또 빛이 확산되어 분위기가 부드럽게 바뀌기 때문이다. 특히 황혼은 어둠이 주는 강력한 대비로 찬란하고 장중한 광경을 연출해 보는 이들을 감탄하게 한다. 황혼은 보는 사람마다 다른 느낌을 갖게 만는다. '벌써 또 하루가 다 가고 어둠이 찾아왔구나'하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고, '힘든 하루가 끝나고 이제 집에서 편안하게 쉴 수 있겠구나'하고 안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분이 바라보는 황혼은 어떤 황혼인가? 자식 보험은 효험이 떨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럼 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정부에 노후를 의탁하면 어떨까?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 진행에 대한 통계청의 경고가 나온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정보에서는 최근 들어서야 그 심각성을 깨닫고 여러 가지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고령으로 인한 치매 환자를 돌보는 시책을 마련하고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하지만 정부의 시책은 당장 도움이 필요한 노인 질환을 국가가 치료해주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기까지는 아직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부 예산이 필요하고, 이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세금을 거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락한 노후생활을 위해 세금을 훨씬 더 많이 내라고 할 때 기꺼이 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직까지 국가에 노후를 맡기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스스로 알아서 준비하는 자기보험뿐이다. 찬란한 노후를 위해 자식 교육에 투자하는 노력을 반으로 줄이고, 이 노력을 자신의 노후에 투자하는 사람은 찬란한 황혼 같은 노후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식에 대한 투자를 줄이는 일이 당장은 자식에게 미안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지 못해 노후에 두고두고 자식에게 짐이 되는 것보다는 현명한 자식 사랑이 될 것이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준비된 노후는 축복이다. 60년 동안의 고된 세상살이 끝에 얻은 값진 휴식이자 자신의 생을 의미 있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경제적으로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껴 쓰면 어느 정도 여유도 있다. 그리고 더 좋은 것은 시간이 충분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돈 벌어 가족 부양하느라고 엄두도 못 냈던 일들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때이다. 또한 정신적으로도 원숙한 경지에 달해 있다. 의존도 싫고 희생도 싫다는 노년의 새 물결이 시작된 것이다. 이보다 더 축복받은 시간이 있겠는가? 그렇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죽지 못해 사는 악몽 같은 시간이 될 것이다. 몸이 아파 병 구완을 받으며 살 수밖에 없게 되면 최악이다. 경제적으로 쪼들려 당장의 의식주 해결이 안 된다면 나라나 사회의 도움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겠지만 품위를 지키면서 살기는 어렵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우리 속담이 있다. 설마설마하고 대책을 미루다가 결국 일을 당하고 만다는 뜻이다. '그런 일이 설마 나에게 일어나겠어?', '설마 그렇게까지 되겠어?'하다가 일이 터지고 나면 대책 없이 후회만 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어떻게 되겠지'하고 미루다가 당하는 것이다. 부지런한 농부는 북풍한설 속에서도 희미하게 묻어오는 봄기운을 맡을 수 있다. 아직 논밭은 한참 겨울이고 바람도 차지만 봄이 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쟁기며 서래며 농기구들을 손본다. 그렇지만 어리석고 게으른 농부는 나뭇가지에 파란 물이 돌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봄이 왔다는 것을 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방향을 바꾸기 위해서는 방향 전환점 수 킬로미터 앞에서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 바다를 항해하는 대형 선박 역시 수백 미터 앞에서부터 미리 준비를 한다. 반면 땅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몇 미터 앞에서 핸들을 조정해도 방향을 바꾸는 데 크게 무리가 없다. 방향을 선회하는 조건은 이렇게 처해 있는 상황과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찬란한 황혼을 위한 준비는 비행기의 방향 전환과도 같다. 준비에 30년이 걸리는 일이다. 당장의 일이 아니라고 미루고 미루다가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다음에 서둘러봐야 이미 때는 늦다.
1925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극작가 조지 버나드쇼는 우리에게 뮤지컬 <마이 페이 레이디(My Fair Lady)>로 잘 알려진 세계적인 극작가다. 그의 묘비에는 극작가다운 묘비명이 쓰여 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리의 정곡을 아플 만큼 콕 찌르는 글이다. 우리가 아물쭈물하는 순간에 노후는 소리 없이 발밑으로 기어들고 있다. 그때 가서 '아차!' 하고 가슴을 쳐봐야 버스는 이미 떠나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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