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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거노인, 고독사에 대해 생각하며 -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효도

하나모자란천사 2019. 3. 4. 00:00

일요일 아침이다.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시간에 홀로 일찍 깨었다. 오늘도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방안 가득 헤이즐넛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지고 있다. 어쩌면 나는 커피를 마시는 것보다 커피 향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블로그에 작성할 글감을 생각한다. 어젯밤 늦은 시간 페이스북에서 사진을 정리하면서 고독사(孤獨死)에 대해 올린 짧은 글을 생각했다. 조금 더 다듬어서 올리면 괜찮을 것 같았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는 고독사를 두 번씩이나 경험했다. 한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서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간다. 그 생명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부모의 죽음은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모의 임종을 지키는 것이 자녀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일찍 아버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53세의 나이로 이 세상과 등지셨다. 27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집에서 임종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도 그랬다. 가족과 일가친척이 다 모여 아버지의 임종을 지켰다. 아버지는 막내인 내가 특별히 걱정이 되었나 보다. 췌장암 말기 환자의 고통을 잊을 수 없다. 죽음과 병증에서 오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는 내게만 글로써 당부를 남겼다. 그것이 내가 아버지와 나는 마지막 대화였다.



세상이 바뀌었다. 혼자 사는 시대로 바뀌고 있다. 문제는 노인이 가족 없이 혼자 사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독거노인(獨居老人)이다. 생활수준의 향상과 의료 서비스의 향상으로 기대 수명은 급격하게 늘어서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은 초고령화 사회로 급격하게 넘어가고 있다. 아쉽게도 노인문제에 대한 사회보장제도가 자리를 잡지 못했다. 노인의 입장에서 접근해야 한다. 평생을 살아온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터전을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자식들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생각도 내재되어 있다. 아직은 누군가의 힘을 빌리지 않고 혼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천명을 앞두고 있는 내가 아직도 20대의 대학시절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양원은 기피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요양원은 나쁘게 말하면 사육장과 같은 느낌이다.


이런 이유로 홀로 사는 노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고독사는 혼자 사는 사람이 돌발적인 질병이나 사고로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남의 일이 아니다. 어머니도 장모님도 독거노인이다. 홀로 살고 계신다. 때문에 주변에서 고독사로 세상을 등지는 분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최대한 연락을 자주 드리는 것뿐이다. 내가 못하면 아이들에게 매일 두 할머니께 전화를 드리라고 한다. 사실 내 전화보다 손주의 전화를 더 반긴다. 주말에는 가능하면 어머니댁을 다녀온다. 단순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작년에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책을 읽었다. 그는 의사이자 미국에서 보건정책관료를 지냈고, 저술가로 책을 쓰고 있다. 그의 책을 읽고 죽음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다. 미국은 우리보다 약 30년 앞서 노인문제를 경험했다. 아직까지 온전히 노인문제를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많은 문제를 앞서 경험했다. 그들은 노인문제를 연착륙했지만 우리는 급격하게 노인문제를 직면하게 된다. 때문에 그들의 제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대한민국의 보건복지 제도를 책임지는 관료들과 의사, 요양원에서 일하는 이들이 그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거노인을 두고 있는 자녀들도 그 책을 읽으면 좋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었으면 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2018년 중반 국회에 계류 중인 웰다잉 법이 국회 본회의를 최종 통과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들의 죽을 권리를 인정해 준 것이다. 책을 읽고 저자인 아툴 가완디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생사를 가르는 순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닐 때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책에서 연명 치료에 대한 부분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호흡기를 달고 연명 치료를 하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대한민국은 유교적인 문화 때문에 자식의 도리를 다 하려고 한다. 누구를 위한 자식의 도리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부모를 위한 것인가? 내가 아내에게 했던 말은 만약 내 의지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그 삶은 의미가 없다고 했다. 나에게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을 내려달라는 얘기를 했다. 


잠시 독거노인의 문제에 대해 다시 얘기를 나눠보자. 책에서는 미국의 요양보호 시설에 대한 얘기를 많이 다룬다. 지금의 미국의 요양 시설은 우리나라의 요양시설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노인들의 삶을 최대한 존중한다. 약물에 의존하기보다는 개인에게 최대한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한다. 예를 들면 요양시설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나 화초 등을 가꾸는 것과 다른 노인들과 교류뿐 아니라 원할 경우 거동인 자유로운 노인이 다른 노인을 돌보는 행위도 가능하다. 왜 일까? 의학적으로도 심리학적으로도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일반 요양원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정해진 틀에 맞춰 생활해야 한다. 그게 싫어 살던 곳에서 혼자 생활을 원한다.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질까? 조금만 알면 상황을 바꿀 수 있다. 노인들의 취미 활동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어머니는 반려동물을 키운다. 복순이라는 강아지다. 어머니는 경로당에 나가면서 다른 노인들을 위해 식사나 반찬도 챙긴다. 아이들의 매일 전화를 해서 어머니와 통화를 한다. 한 달에 한두 번 이상 어머니를 만나고 온다. 이 대부분이 책에서 언급이 된 것이다. 왜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일까? 연구결과에 의하면 혼자 사는 노인보다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노인이 더 건강하고, 가족들이 자주 찾아 뵙는 노인이 더 오래 산다고 한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효도다. 어머니께 살아야 할 이유와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제도 어머니를 뵙고 왔다. 자식들에게 한 가지라도 더 챙겨 주려는 어머니를 만려하지 않는다. 가끔은 어머니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챙긴다. 아내가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