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Life/Photo Essay

진교 시장 골목에서 30년전 기억을 떠 올리다

하나모자란천사 2018. 11. 5. 09:31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이다. 아내와 막내는 양산 처가에 갔다. 큰 아이와 둘은 아침 일찍 어머니댁으로 향했다. 고향집에 도착 후 아이를 내려놓고 어머니와 진교 시장으로 향했다. 10월 28일은 진교에 5일장이 서는 날이다. 진교는 3일, 8일에 장이 열린다. 어머니는 굴을 팔기 위해 시장 골목으로 향했고, 나는 인근에 주차 후 주변을 거닐었다. 천천히 주변을 거닐다 보니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내가 이곳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있었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강산이 세 번 바뀌는 시간이 흘렀지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건물들을 보니 그 시절의 기억들이 하나, 둘 떠 올랐다.




처음 내 시선을 빼앗은 것은 목욕탕이다. 해원탕이라는 목욕탕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처음 대중목욕탕은 나무 보일러를 사용하는 곳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단열 설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천장에 물방울이 맺히고 떨어지는 곳이다. 무엇보다 좁은 목욕탕을 이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제대로 목욕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후에 크기는 작지만 요즘과 같은 시설을 갖추고 세워진 목욕탕이 이곳 해원탕이었다. 중학교 시절 이곳을 자주 이용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이곳을 이용하고 계신다. 시장에서 가까워 접근성이 좋기 때문이다. 기회가 되면 아이들과 함께 이곳을 이용해보려고 한다.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다.



다음은 이용원이다.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아직도 운영 중이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시절에는 남자 학생들은 전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었다. 바리깡으로 머리를 거의 밀고 가위로 손질하는 것은 별로 없었다. 전기 바리깡은 없었고, 간혹 바리깡에 머리칼이 씹히기라도 하면 머리칼 몇 개는 그냥 뽑히기도 했다. 이발 후 여름에는 차가운 물에 버리를 감고, 겨울에는 보일러 위에 있는 물통에서 더운물을 물조리게에 담아서 머리를 감았다. 지금은 아니겠지? 혼자 옛 추억을 떠 올리며 웃음을 지어 보았다.



다음은 중국집, 이발관 맞은편에 있는 중앙반점이다. 내가 자장면을 처음 먹은 것이 중학교 시절로 기억한다. 그 시절에는 그랬다. 요즘처럼 외식이 생활화되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날이어야 먹을 수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모여서 이곳 중앙반점에서 자장면을 먹거나, 장날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나왔다가 자짱면을 먹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은 여전히 자장면이 가장 인기 있는 외식 메뉴라는 것이다.




진교 시장 골목이다. 왼쪽에 있는 동진상회는 원래는 동진축산이었다. 식육점의 빨간 조명등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철물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어머니는 시장 골목 입구에서 계절에 따라 굴, 바지락, 생선 등을 팔았다. 어머니의 그 수고와 고생 덕분에 오늘의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닌 시기는 80년대 후반이다. 그 시절 시골 가정에 승용차는 없었다. 마을 전체를 통틀어도 겨우 한두 대가 있었을까. 때문에 대부분 버스를 이용했고, 혹 버스를 놓치거나 짐이 많은 경우는 택시를 이용했다. 그것도 혼자서 이용하는 것은 부담스럽고, 장터에 나온 마을 주민들과 함께 택시비를 부담하는 형태로 택시를 이용했다. 금오택시...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나무판자로 가린 곳은 사무실로 들어가는 문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기사님들이 모두 휴대폰을 가지고 있지만 예전에는 사무실에서 전화로 접수받아 기사님들께 연결하는 형태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운영하는 곳이 많다.



짧은 시간이었다. 진교 시장을 중심으로 인근 거닐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 추억 여행을 다녀온 것 같다. 사진이 좋다. 지금은 이렇게 직접 진교 시장을 방문해서 추억을 떠 올렸지만 언젠가는 사진과 이 글을 보며 다시 지금의 이 시기를 떠 올리겠지. 혹, 다른 이가 이 사진들을 보고 나와 같은 또는 다른 추억을 떠 올릴지 모른다. 그가 누구였던 나와 같은 즐거운 추억을 떠 올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