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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을 거닐다 (1) 고려 현종의 부자 상봉길

하나모자란천사 2018. 2. 9. 22:05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고향에 대한 향수가 더 커지나 봅니다. 2007년 고향인 하동(진교)과 가까운 곳으로 내려오고 싶어서 직장을 성남에서 이곳 사천으로 옮겼습니다. 이제 사천에 정착하고 살아온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죠. 그 시간을 사천에서 살았지만 정작 사천에 대해 아는 게 없었습니다. 삶에 조금 여유가 생기고 사천을 알고자 시작한 사천시 SNS 서포터스 활동이 1기와 2기를 거쳐 2018년 3기까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SNS 서포터스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는 사천에 대해 자랑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번 3기 활동을 통해서는 '사천을 거닐다'라는 주제로 사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그 후기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려 합니다.




사천의 많은 자랑거리 중 무엇을 처음으로 소개할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사천 8경 중 하나를 소개할까? 요즘 핫(Hot)한 사천 바다 케이블카를 소개할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자주 찾는 비토섬의 관광상품을 소개할까? 이런 것보다는 사천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것이 없을까를 생각했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글의 시작에서 언급했던 '고향'과 관련된 것입니다. 지금부터 다른 어떤 곳과 비교할 수 없는 사천만의 특색이자 전국을 통틀어 딱 두 곳밖에 없는 사천의 자랑을 소개하려 합니다.


사천은 풍패지향의 고장입니다. 여기서 풍패지향이란 왕조의 고향을 뜻합니다. 왕조의 고향이라면 제일 먼저 떠 올리는 곳이 조선 왕조의 고향인 전주입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고향이 전주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그럼 사천은 어느 왕조의 고향일까요? 조선이 아닌 것은 확실하고 그럼 어느 왕조의 고향일까요? 정답은 고려 왕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고려 왕조는 태조 왕건이 세운 나라이고, 왕건은 개경(지금의 개성)이 고향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사천이 고려 왕조의 고향이 될 수 있을까요? 그 자세한 이야기는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여기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상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전주와 사천을 제외하고는 풍패지향의 고장이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천이 바로 그런 곳입니다.



잘 보셨나요? 고려 8대조 현종이 즉위 한 이후 고려 왕실은 현종의 직계가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현종은 즉위 후 "사천을 내 마음의 고향으로 삼으니, 풍패지향으로 부르라"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사천은 고려 왕조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저는 '사천을 거닐다'의 첫 장소로 아버지 왕욱(안종)과 아들 순(현종)의 애틋한 부정이 서려 있는 사천시 사남면 능화 마을에서 사천시 정동면 대산마을까지 부자 상봉길을 선택했습니다. 아버지 왕욱은 매일 아침 일찍 배방사에 있는 아들 순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나섰습니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의 발걸음은 가벼웠겠지만 죄인의 몸이라 함께 하지 못하고 저녁이 되면 눈물을 머금고 귀양지인 능화 마을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 길을 나도 왕욱의 마음으로 거닐어 보았습니다.



지난 2월 4일 일요일 아침은 무척이나 추웠습니다. 절기로는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었으나 동장군이 봄이 오는 것을 시기 질투를 했는지 아니면 이날 부자 상봉길을 거닐면서 왕욱의 마음을 헤아리기를 바랐는지 바람까지도 차가웠습니다. 이른 아침 등산복 차림으로 배낭에 삶은 계란 3개와 물을 챙기고 집을 나섰습니다. 오늘 거니는 구간이 사천시 사남면 능화 마을에서 출발해서 사천시 정동면 대산마을까지 거니는 구간이라 차량을 가지고 갈 수 없었습니다. 아내에게 부탁해서 능화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내려서 아버지 왕욱의 발걸음을 따라 거닐기 시작했습니다.



오전 10시에 약속이 없었더라면 왕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능화 마을을 둘러보려 했으나 오늘은 부자 상봉길을 따라 거니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능화 마을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부자 상봉길에 대한 이정표가 있습니다. 이곳 능화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대산마을까지는 약 8 Km입니다. 어른 걸음으로 약 2시간 정도의 거리입니다. 매일 아버지 왕욱은 이 길을 오갔습니다. 아들을 만나러 가는 그 길은 발걸음이 가벼웠겠지만 아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어떠했을까요? 우선 이날은 제가 왕욱이 되어 아들을 만나러 가는 마음이 되어 이 길을 거닐었습니다.


아마도 왕욱은 아침 일찍부터 걸음을 재촉했을 겁니다. 아들 순(현종)이 있는 배방사까지는 가는데 2시간, 다시 저녁이 되어 어두워지기 전까지 돌아오는데 2시간, 지금처럼 해가 짧은 겨울에는 조금이라도 아들을 더 보고자 아침 이른 시간에 움직였을 겁니다. 지금은 부자 상봉길이 차도 다닐 수 있도록 임도가 잘 조성되어 있지만 왕욱은 숲길을 거닐어 고자봉을 넘고 학촌마을을 지나 사천강을 건너서 대산마을까지 가는 길이 그리 쉬운 길은 아니었을 겁니다.



능화 마을을 지나 산길에 들어서면 저수지가 하나 있습니다. 추운 날씨 때문에 저수지가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보니 왕욱의 마음도 이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아들이 있지만 추운 날 아들을 품고 같이 잠을 잘 수 없는 부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지금은 빨리 고자봉을 넘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고자봉을 넘기 전에 안종능지(왕욱의 묘지)가 보입니다.



아버지 왕욱은 오직 아들을 보는 낙으로 살며 매일 같이 사남 땅 능화 마을에서 정동 땅 배방사까지 하루 두 번 이 길을 걸어 아들을 만나러 다녔지만 죄인의 몸이라 함께 할 수 없기에 날이 저물기 전에 이 길을 되돌아와야 했습니다. 배방사에서 아들 순과 헤어지고 고자실(지금의 학촌마을)을 지나 고자봉에서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했겠죠. 그렇게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기를 4년 결국 아버지 왕욱은 귀양 온 지 4년 만인 996년 세상을 떠났고, 아들 순은 배방사에서 4년을 살다가 6살이 되더 해 개성으로 올라갔고, 마침내 1009년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고려 8대 임금 현종입니다.



왕욱은 평소 풍수와 지리에 능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이르렀을 때 아들 순(현종)에게 금 한 주머니를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 금을 지관에게 주고 나를 이 고을 성황당 남녘 귀룡동(지금의 능화 마을 뒷산)에 매장하게 하되 반드시 엎어서 묻게 하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묏자리가 풍수적으로 임금이 날 자리인데 시체를 엎어서 묻으면 더 빨리 임금이 난다는 뜻이었습니다.



아들 순이 왕위에 오른 후 아버지 왕욱을 효목대왕이라 높이고 안종이라 하고 어머니를 효숙태후로 주촌 하였습니다. 이후 지금의 능화 마을에 있던 시신을 경기도로 옮기고 건릉이라 하였고, 여기는 그 터만 남아 있습니다. 훗날 현종은 어린 시절을 보낸 사천 땅을 은혜를 베푼 땅이라 하여 많은 특혜를 베풀었는데 당시 진주목에 속해있던 작은 고을이었던 사천을 사주현으로 승격시키고, 사주를 왕의 고향이라는 뜻의 풍패지향이라 하였는데, 역사적으로 풍패지향이라 부르는 곳은 조선시대의 전주와 고려시대의 사주(지금의 사천) 밖에 없습니다.



사진의 이곳이 아버지 왕욱(안종)의 무덤이 있던 곳(안종능지)으로 가는 길 입니다. 사천시에서는 2015년 사주로 승격된 지 1천 년을 기념하여 고려 8대 임금 현종을 모셨던 배방사의 사지 터와 부자 상봉의 애환이 서린 고자실 길을 복원하는 작업에 나섰고,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아버지 왕욱이 아들을 만나기 위해 거닐었던 부자 상봉길입니다.



안종 능지를 지나 임도를 따라 산길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잘 조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 길을 계속 거닐면 이내 곧 고자봉에 도착을 합니다. 고자봉에 오르면 멀리 아들 순이 있는 정동 땅 대산마을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쁘게 이곳까지 올랐으니 잠깐 쉬어 가도 되련만 아마도 왕욱은 조금이라도 더 아들을 보려는 마음에 쉼 없이 발걸음을 재촉했을 것입니다.



이곳 고자봉은 왕욱이 아들을 보고 고자실을 지나 다시 능화 마을로 돌아가면서 아들을 두고 온 배방사를 향해 몇 번이나 되돌아보면서 눈물을 흘린 곳이라 생각이 됩니다. 그 부자 상봉의 애환을 담아 부자 상봉길의 중앙인 이곳에 고자정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잠시 고자정을 사진에 담고 나도 다시 왕욱의 마음으로 급하게 발걸음을 재촉해서 고자실(학촌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사천시 정동면 학촌리(고자실)는 아버지 왕욱이 아들 순(현종)을 만나기 위해 배방사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이 마을에는 왕욱이 고려왕실에서 쫓겨나 귀양을 오게 된 내용과 아들 순이 배방사에 머물면서 아버지를 만나는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습니다.




학촌 마을까지 내려왔건만 아직도 아들이 있는 배방사까지 4 Km가 남았습니다. 다시 왕욱은 바쁜 발걸음으로 사천강 길을 따라 아들이 있는 대산마을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사천강을 따라 혼자 거닐면서 왕욱의 마음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바람이 옷깃을 스며들 때마다 살은 점은 굳어졌고, 발걸음도 무거워졌지만 이 길을 걷고 또 걸어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아들 순을 더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드디어 배방사가 있는 대산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쉼 없이 8 Km를 걸었으니 잠시 쉬어도 되련만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대산마을에 도착하니 풍패지향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오늘 배방사가 있던 배방사 터까지 거닐고 싶었으나 약속시간인 10시가 다 되어서 오늘은 대산마을에서 '사천을 거닐다'의 부자 상봉길 거닐기를 마쳤다. 다음에는 배방사 터가 남아 있는 배방사지에서 다시 능화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거닐어 보고 싶다. 오늘 걸었던 이 길은 아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아들을 두고 돌아가야 하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어떠했을까? 다음에는 그 마음으로 배방사지에서 능화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거닐어 보고 싶다.



사천에 오면 고려 현종의 부자 상봉길을 꼭 거닐어 보세요. 아이들과 함께 거닌다면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이 되고, 부자 간의 애환의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와 함께 걷다 보면 부자 간의 정이 더욱 돈독해 질 것입니다. 저도 아이와 함께 이 길을 꼭 거닐어 보기 위해 사전 답사의 성격으로 오늘은 혼자 이 길을 걸었지만 다음에는 꼭 두 아들과 함께 이 길을 걸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