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0월 6일 요란했던 태풍 쿵레이는 무사히 지나갔다. 토요일 태풍이 지나기까지 비상근무를 했다. 오후가 시작될 쯤부터 먼 하늘부터 맑아 오더니 일몰 무렵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파란 하늘을 보여주었다. 그나마 바람은 뒤끝이 있어서 태풍이 지나고 난 후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태풍으로 인해 이번 일요일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그러다 지난 주말에 가족과 함께 의령 한우산으로 가을 산행을 나설 때 보았던 지리산 천왕봉의 풍경이 떠 올랐다. 그래 내일은 지리산으로 가자. 그렇게 생각하고 바로 준비로 이어졌다. 이번 산행은 아내와 큰 아이는 빠지고 나와 둘째 녀석이 함께 하기로 했다.
산책 후 집으로 들어가면서 도시락(김밥), 초코바, 생수를 구입했다.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이어서 나가면서 구입하는 것보다 미리 구입하고 새벽 일찍 출발을 하기로 했다. 조금 걱정은 된다. 지리산 천왕봉을 몇 차례 다녀왔지만 가장 최근에 다녀온 것이 거의 10년 전쯤이다. 그것도 한동안 산행을 않다가 최근에 산행을 하고 있지만 체력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은 몸으로 느끼고 있다. 게다가 초등학교 4학년인 아이와 함께 하는 산행이다. 아이보다 내가 더 걱정이다.
걱정 때문일까 토요일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그럼에도 일요일 새벽 5시가 되기 전 잠에서 깨었다. 알람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어찌 그리 정확하게 잠에서 깨는지. 병이다. 늘 그렇다. 때문에 두통이 자주 있는 것 같다. 둘째 녀석은 잔뜩 기대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5시에 못 일어나면 혼자 간다고 했더니 알람을 맞추고 잠들었다. 그런데 녀석도 나를 닮아서 그런지 알람이 울리기 전에 벌떡 일어났다. 나처럼 두통은 없어야 할 터인데.
가볍게 세수를 하고 산에서 컵라면을 먹기 위해 보온병에 끓은 물을 챙기고, 계란 삶은 것과 사과 등을 준비하고, 어제 미리 준비한 도시락, 생수, 초코바 등도 챙겼다. 아내가 일어나서 국밥을 말아줘서 가볍게 아침을 먹고 5시 30분쯤에 집을 나섰다.
사천읍을 지날 무렵부터 안개가 자욱했다. 오늘 산행의 풍경이 아름다울 것 같았다. 사천 IC에서 차를 올렸다. 단성 IC에서 차를 내려 지리산 중산리 탐방 안내소까지는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잠이 부족했을 아이를 위해 온열 시트를 켰더니 아이는 이내 잠들었다.
단성 IC에서 내려 중산리로 들어가는 동안 풍경이 너무 예뻤다. 내려서 사진이라도 찍고 싶었지만 빨리 산행을 시작해야 하기에 지나가는 풍경에 만족하고 중산리 탐방 안내소까지 곧장 달렸다. 안내소 주차장에 들어섰을 때 주차요원이 보이지 않았다. 일찍 출발해서 주차비를 굳었다고 생각했다. 지상 주차장으로 갔으나 공사 중이라 주차를 할 수 없었다. 차를 돌려 지하 주차장에 주차 후 지상으로 올라갔다.
먼저 도착한 다른 산행팀은 산행에 앞서 몸풀기를 하고 있었다. 아이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가족으로 보였다. 산행에 앞서 화장실에 들러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등산로 입구로 들어서려는데 통제소에서 가로막았다. 이유인즉 태풍으로 인해 계곡 물이 넘쳐서 입산 통제라고 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정말 큰 마음을 먹고 이렇게 새벽안개를 가르고 이곳까지 달려왔건만 입산 통제라니 너무하다.
나보다 아이의 실망이 더 커 보였다. 가족 산행을 하면서 종종 지리산 천왕봉 얘기를 아이들에게 해 주었다. 이제 아이들은 제주도 한라산을 제외하고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 지리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적으로 아픔도 많은 곳이라는 얘기도 전해주었다. 그리고 지리산 천왕봉의 표지석 뒤에는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되다'라는 문구가 있다는 것도 얘기해 주었다. 때문에 둘째 녀석은 꼭 이곳을 다녀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안전이 최우선이다. 차를 돌려야 했다. 이곳까지 왔다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다음을 기약하고 차를 돌렸다. 조만간 다시 이곳을 들려야 한다. 아이의 실망하는 모습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음에는 온 가족이 함께 와야 할 것 같다. 아마도 아내와 큰아이가 함께 하지 못해서 산행을 가로막은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생각하련다. 사실 갑자기 지리산 산행을 떠 올려서 준비도 부족했다. 산행코스부터 시간까지 다시 계산을 하고, 준비를 해서 재도전하겠다.
돌아가면서 지리산이 아닌 다른 산을 생각했다. 이렇게 준비해서 나왔는데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곳으로 오면서 좋았던 풍경을 그냥 지나쳤는데 내려가면서 천천히 풍경을 즐기고 사진도 찍었다. 오늘은 지리산을 대신해서 고성 갈모봉 편백휴양림으로 갈 것이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가자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