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다가왔다. 뭘 해도 좋은 계절이다.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깨어 추석 연휴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을 하고 있다. 다행히 날씨는 좋았다. 베란다로 나가서 창문을 열어젖혔다. 새벽 공기가 싸늘하게 살을 파고들었다. 미명의 새벽을 뚫고 밝음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틈새로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쩌면 오늘은 삼천포대교에서 해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후 다른 생각은 없었다. 급히 산책하기에 편안한 등산복으로 갈아 입고, 드론 가방과 카메라를 챙겨 들고 밖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삼천포대교다.
그렇게 삼천포대교를 목적지로 정하고 나선 발걸음이었지만 사천 시청을 지나고, 사천대교를 지날 즈음에 차를 돌려야 했다. 크게 눈을 뜨고 실안과 삼천포대교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지만 해무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와 똑같은 삼천포대교의 풍경은 의미가 없다. 지금까지 드론으로 촬영한 영상도 충분하다. 위 사진은 작년 가을에 촬영한 해무가 넘는 삼천포대교의 풍경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난번 통창공원에서 올려다본 와룡산을 떠 올렸다. 수줍은 여인처럼 구름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 오히려 나의 시선을 끌었던 녀석. 그래 오늘은 와룡산이다. 그렇게 목적지가 정해졌다.
와룡산은 민재봉과 새섬봉, 천왕봉(상사바위)이 있다. 원래는 민재봉을 와룡산의 정상으로 알았으나 GPS가 발달하면서 민재봉이 아닌 새섬봉이 정상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렇게 정상이 바뀐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처음 사천에 내려와서 와룡산을 오를 때만 해도 민재봉이 와룡산의 정상이었다. 그때가 2007년이다. 그러나 지금은 새섬봉으로 바뀌었다. 정확하게 언제 바뀌었는지는 모른다.
궁금했다. 궁금하면 오백 원 아니 구글링이다. 그렇게 검색은 시작되었고, 구글은 눈 깜짝할 짧은 순간에 해답을 나에게 주었다. 2010년이다.
향토사학자 문옥상(73)씨가 와룡산의 높이에 이의를 제기한 글을 당시 김수영 시장이 읽고 확인을 지시하면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그동안 제2봉으로만 알았던 새섬봉의 높이가 801.4m로 사실상 와룡산의 진짜 정상이었던 것. 더욱 놀라운 것은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지난 2006년부터 새섬봉과 민재봉의 해발고도를 이같이 측정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시는 2010년 7,700만 원의 사업비를 들여 새섬봉 일원(새섬봉~도암재)에 정상석, 안전로프, 목재 데크로드 등을 설치, 새섬봉이 와룡산의 정상임을 알리는 작업을 했다.
자세한 내용은 경남신문 인터넷 기사를 클릭해서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산을 오를 때 정상을 밟으려 한다. 이유는 하나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와룡산을 찾을 때 가장 많이 찾는 코스가 남양동 - 도암재 - 새섬봉 코스다. 나도 이 코스를 가장 좋아한다.
와룡산을 오르는 등산코스는 다양하다. 종주코스로는 내가 살고 있는 동강아뜨리에 인근인 안점산 봉수대를 시작으로 하늘먼당을 지나 민재봉과 새섬봉을 넘어가는 코스도 있고, 민재봉이 와룡산의 정상으로 인식했을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백천사에서 시작하여 백천재를 지나 민재봉을 오르는 코스, 진분계에서 시작해서 민재봉으로 오르는 코스, 그리고 와룡골에서 시작해서 민재봉으로 오르는 코스 등이 있다. 어느 코스를 이용하더라도 와룡산은 전국 100대 명산에 포함되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산이다.
오늘은 백천사에서 시작해서 백천재를 지나 민재봉을 오르는 코스를 선택했다. 이유는 나중에 알 수 있다. 이 코스는 백천사 앞 넓은 주차장을 이용해서 등산을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이른 시간이기에 다른 등산객들이 없기에 백천사를 지나 산불감시초소 입구에 주차를 하고 그곳에서 등산을 시작했다.
아직 해가 오르기 전이다. 등산을 시작할 무렵이 아침 6시 30분쯤이었다. 혼자 오르는 산행이다. 조용히 사색을 즐기며 산길을 거닐 수 있었다. 다행히 어두움은 완전히 물러가고 밝음이 찾아와서 혼자 걷는 산행이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산불감시초소에서 백천재까지 오르는 등산구간은 숲이 무성해서 여름에도 뜨거운 햇살을 피해 거닐 수 있는 구간이다. 등산로 주변은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로 조성되어 있다. 가을이라 곳곳에 다람쥐와 청설모의 먹이인 토토리가 떨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 위로 무언가 툭툭 떨어지는데 거의 대부분이 토토리다. 마음만 먹고 주으면 쉽게 20Kg 포대 한 자루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산 짐승들의 겨울나기 먹이이기에 사진 몇 컷만 남기고 그냥 산길을 걸었다.
백천재 구간 중간쯤 암석 구간이 있다. 처음 이곳에서 길을 잃고 엉뚱한 곳으로 향했던 적이 있었다. 지금은 중간중간 이정표와 바위 위에 페인트로 방향 표시를 해 두어서 길을 잃을 염려가 없다. 사방이 트인 이곳에서 잠시 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 사천대교가 눈에 들어왔다.
이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카메라는 손에 들고 왔지만 드론을 챙겨 오지 못했다. 사실 카메라와 드론까지 챙겨서 산에 오르는 것이 쉬운 게 아니다. 등산 때 드론을 날리기 위해 작은 드론은 매빅 에어를 구입했고, 집에서 나설 때는 팬텀 4 프로와 매빅 에어를 같이 챙겨 나왔건만 산행에 나설 때 배낭에 챙겨 넣지 못했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다시 백천재를 향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곳에서 백천재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곧 백천재에 올랐고, 밴치에 앉아 잠시 쉼을 얻는 동안 아침 해가 떠 오르기 시작했다. 순간 눈에 들어오는 한 폭의 수묵화. 그 수묵화는 자연이 그린 그림이다. 아침 햇살에 투영된 풀잎이 한 폭의 수묵화가 되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사진을 시작하면서 보게 되었다.
백천재에서 민재봉에 오르는 구간이 힘든 구간이다. 그러나 많이 올랐던 길이기에 부담은 없다. 오늘은 급할 것도 없었다. 다만 아침도 먹지 않았고, 배낭에는 카메라와 렌즈 말고는 다른 먹거리도 마실 물조차 없었기에 조금 부담은 되었다. 원래 목적지가 이곳이 아니었기에 아무것도 챙기지 않았었다.
그래서 최대한 천천히 즐기면서 산을 올랐다. 조금 더 오르니 고성과 진주 방향으로 운해가 걸쳐 있는 것이 보였다. 사진에 몇 컷을 담았다. 민재봉의 정상에서 운해를 보고 싶었다. 발걸음을 빨리 했다. 그렇게 진분계 갈림길에 오르고 나서야 운해를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아쉬웠다. 저 운해가 삼천포 대교에 있었더라면 아름다운 사진과 영상을 드론으로 담을 수 있었다. 곧 기회가 올 것이다. 실망할 필요가 없다.
이제 민재봉으로 향했다. 진분계 갈림길에 민재봉까지는 완만한 능선 구간이다. 봄에는 와룡산 철쭉으로 유명한 곳이다. 사천 8경 중 제5경에 속하는 와룡산의 철쭉이다. 여기서부터 사천의 거의 모든 곳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사천만의 갯벌과 들판이 눈에 들어왔다. 누렇게 익어가는 들판을 보니 가을이 틀림없다.
민재봉으로 향하는 구간에서 이름 모를 들꽃이 나를 반겨 주었다. 산 정상이라 바람이 불 때마다 몸을 바람에 맡긴 채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모습이 부럽다.
나도 그렇게 자연에 의지하며 삶을 살아보고 싶다. 곳곳에 억새꽃이 피었다. 억새를 보니 가을 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드디어 민재봉에 도착했다. 바람이 제법 불었다. 그러나 맑은 가을 공기로 인해 민재봉에서 와룡골과 삼천포 시내뿐 아니라 멀리 남해, 사량도, 지리산, 진주, 여수까지도 내다볼 수 있었다. 카메라로 먼 풍경까지 담아 보았다. 오늘은 삼각대도 챙겨 왔기에 혼자서 인증샷도 남겨 본다.
이 시점에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퀴즈를 한 번 내 본다. 위 사진에는 보이는 다리와 이름을 맞춰보자. 비토섬, 남해, 광양, 여수를 생각하면 다리를 찾을 수 있고, 이름을 맞출 수 있다. 정답을 맞춰도 상품은 없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산에 올랐기에 배가 고파 왔다. 하산을 해야 한다. 빠른 걸음으로 산을 내려왔다. 이제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오늘 산행의 목적을 밝힐 때가 되었다. 계곡 물소리가 듣고 싶었다. 이곳 백천재 구간으로 여름 산행을 하면 좋은 이유 중 하나가 계곡의 물소리다. 특히나 늦은 여름부터 많은 비가 내렸기에 백천재 계곡에는 지금 물이 넘쳐흐르고 있다. 백천재를 지나고 돌무더기 구간을 지나면 백천재 계곡을 따라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등산로까지 들려온다. 흐르는 계곡물에 땀도 씻겨내고 목도 축이기 위해 계곡으로 내려갔다.
산 능선 사이로 스며든 빛이 계곡의 구석구석을 비추고 있었다. 그냥 씻고 목만 축이고 가기에는 아쉬웠다. 계곡의 물소리를 동영상으로 찍어서 담아 보았다. 그리고 장노출을 이용해서 계곡의 물 흐름을 사진에 담아 본다. 이렇게 하나씩 나는 사진을 배워가고 있다. 이것이 오늘 백천재 코스를 선택한 이유다. 나름 만족하는 사진을 얻었다. 오늘 산행으로 와룡산의 가을도 충분히 느끼고 원하는 사진도 얻었다. 즐겁다. 이제 맛있는 한 끼 식사를 향해 고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