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ding Story

#0337 - 사진철학의 풍경들, 진동선

하나모자란천사 2019. 10. 26. 09:37

 2019년 책 100권 읽기 여든다섯 번째 책입니다


진동선 그의 글을 읽고 싶다. 그의 글을 읽으면 사진에 대한 깊이가 느껴진다. 도서관에서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책을 발견하고 바로 대여를 했다. 일단 볼륨에서 부담이 느껴지지만 그의 책은 미루지 않았다. 바로 읽기 시작했다. 사진에서 철학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일까? 사진의 기능이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이라면 논리적 이성으로 족하고, 사진의 기능이 ‘볼 수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이라면 감각적 감성이면 족할테지만,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사진은 다른 예술과 달리 이 두 가지 모두를 필요로 하므로 논리적 이성과 감각적 감성 모두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모든 사진들은 기본적으로 세 사람의 주인공과 세 가지의 다른 눈을 필요로 한다. 사진가 한 사람과 그의 눈, 피사체 한 사람과 그의 눈, 관객 한 사람과 그의 눈이다.


사진예술에도 감각은 필수이지만 이 감각은 상당 부분 학습을 통해 배양된다. 천부적이 아닌 후천적인 계발, 연마로부터 배양되므로 노력과 학습으로 감각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후천적으로 나만의 독특함 감각을 배양할 수 있을까? 과연 타고난 감수성이나 감각이 없다고 스스로 자탄하는 사람도 학습을 통해 감각을 키울 수 있을까?


일반 사진가들은 대게 사진을 한 컷으로 단절시켜 찍는다. 한 장을 찍고 또 다른 곳에 가서 한 장을 찍는 방식이다. 사물을 끊어서 바라보는 단절된 눈으로는 감각이 출현하기 어렵다. 사진은 비록 한 장, 한 컷으로 찍히지만 장면을 끊어서 보아서는 안 된다. 세상이 연속이듯이, 우리 눈이 연속으로 사물을 바라보듯이, 사진을 찍을 때도 세상을, 피사체를 연속적인 흐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개성적인 프레임을 얻을 수 있고 정지 화면이지만 감각적인, 딱딱하지 않은 동적 감각을 얻을 수 있다.




사진은 다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 사진을 찍을 때 모퉁이에 기대어 절반만, 부분만 바라보라 말한다. 숨김없이 모두 드러내는 것보다 채 못다 한 말처럼 여운이 남게, 미련을 두라 말한다. 아름다운 사진은 미련이 많은 사진이다. 다 보여주지 못해 그리움이 배어 있고 다 말하지 못한 연민이 흐르는 것이다. 세상의 풍경은 적당히 감추고, 감춰줄 때 아름답고 오래가는 삶의 풍경이 된다. 우리 삶에 모퉁이들이 많은 이유이다.


사진은 단절로 태어났다. 한 컷, 한 장이 단절로 자리한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심지어 지금까지도) 사진을 컷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한 장 건진다”는 표현이 빈번히 쓰인다. 그러나 사진의 출현 방식은 그렇더라도 사진가의 사유는 연속의 결과 속에 있어야 하고 시공간의 흐름 속에 있어야 한다. 의미 있는 사진,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사진, 메시지가 충실한 사진은 대부분 연속성, 연결성, 지향성의 의식으로부터 싹트기 때문이다. 생명이 결여된 사진과 생명이 충만한 사진, 스토리가 있는 사진과 스토리가 없는 사진, 긴장 없는 사진과 긴장을 출몰시키는 사진의 차이는 이 틈에서 발생한다. 사진은 시공간 속에서 흐름과 지속을 바탕으로 방향성과 지향성을 지닐 때 생명력이 출몰한다. 사진을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주제의 연속성과 연결성이다. 그래서 주제사진이 어렵다고 말한다.


사진이 비록 한 장씩 찍히고 한 장씩 들여다보는 구조라 할지라도 사유와 인식만큼은 우리의 눈과 마음이 보는 것처럼 연속으로, 연결로 대상을 보고 다가서야 한다. 그런 태도와 방법론을 갖추었을 때 바로 ‘자기만의 시선’, ‘자기만의 생각’,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는, 개성 있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다.


사진은 시간의 풍경이다. 사진은 언제나 시간 속을 거닌다. 존재의 시간을 탐색하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우선한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이 그것은 길고 긴, 영원한 탐색의 길이다.


1993년, 시카고에서 듀안 마이클은 이런 말을 했다.


“비밀이 많은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피사체도 그렇고, 사진가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대번에 알아채는 것보다 보면 볼수록, 알면 알수록, 시간이 가면 갈수록 조금씩 드러나는 비밀이 많은 사진이 좋은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잘 찍는다’와 ‘사진을 잘한다’라는 말은 다르다. 사진을 잘 찍는 것은 지식 없이도 가능하지만 사진을 잘하는 것은 지식(의식과 지향) 없이는 불가능하다. 하루 세끼 잘 먹고 잘 살 수 있지만 인간답게 살기는 어려운 것과 같다.


롤랑 바르트는, 그리고 수전 손택은 사진에서 가장 기묘하고, 가장 심오한 것 중의 하나가 ‘사진의 우연성’이라고 했다. 사진에는 세 가지 우연성이 있다. 했는데 대상과의 시간, 공간, 그리고 표현의 우연성이다. 먼저 시간의 우연성은, 대상이 그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선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공간의 우연성은 대상이 그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찍을 수 없다는 것이고, 표현의 우연성은 대상을 노출한다고 해도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과거이기(흘러갔기) 때문에 원래의 모습과 다른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개연성이 크다는 것이다.


사진에서 물리적 노출은 허술할 때가 많다. 적정노출이 참으로 위험할 때가 많다. 예술사진에서 모든 사진의 노출은 지향적이어야 한다. 밝고 어두움은 지향적 유사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그저 카메라의 지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투사된 눈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인식적 피사체(혹은 존재)의 닮음, 지향적 형상으로부터 판단, 결정되어야 한다.


한 장의 사진은 무엇을 찍었건 어떻게 찍었건 간에 그 사람의 감정의 표상이다. 세상과 인간의 감정이 하나 되어 나타난 어떤 것이다. 세상 앞에 섰던 누군가의 감정의 울림이며, 그 사람의 마음이 새긴 감정의 파장이다.


사진은 어떤 이유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러나 취미든 재미든 직업이든 제대로 된 사진이려면 자기 생각, 자기 소재, 자기만의 아끼고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아무거나’ 만큼 참혹한 주문이 없는 것처럼, 아무거나 찍는 사진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주제, 소재, 대상을 분명히 가릴 줄 알아야 하고 자신의 것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


사진을 공부하다 보면 여러 미학 이론이며 작가론이며, 혹은 작품론과 관계된 잡다한 이즘과 예술철학을 섭렵하게 된다. 잡다하다고 말하는 것은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보다 모르면 안 될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에 공부하는 것도 있고, 억지로 공부하는 지식도 있고, 또 어떤 때에는 알아두면 지식을 뽐낼 수 있을 것 같아 공부하는 경우도 있고, 또 어떤 때에는 운명처럼 날아와 알게 되는 지혜들도 있다.


깊이를 포기할 것인가, 깊이를 좇을 것인가? 철학이 예술에게, 예술가에게, 예술적 표현에 깊이를 강요한다면 전적으로 직관과 사유 때문이다. 뿌리 깊지 않은 나무에서 무성한 잎이 생길 수 없듯이 가벼운 직관과 사유에서 표현의 깊이가 스밀 수 없다. 사진이 그렇다. 지성과 감성의 깊이 없이 사물을 좇으면서 동시에 사물을 형성시킬 수 없다.



수전 손택 요즘 가장 자주 만나는 이름이다. 누굴까?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 일단 그녀의 말을 보자. 수전 손택은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말한다. “해석은 권력이다.” 깊이가 없다는 것도 하나의 권력이고 깊이가 있다는 것도 권력이다. 우리는 부단히 해석을 기다리고 판단을 기다린다. 어떤 해석을 바라고 어떤 판단을 고대하는가. 혹시 “깊이 있는 작품”이라는 평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깊이로부터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왜 이 사진은 마음에 들고, 저 사진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왜 이 사진은 멋진데 저 사진은 감흥이 없는지,

그것이 사진가 때문인지, 아니면 나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분위기 때문인지 살필 수 있다면 충분하다.


이제는 다이안 아버스다.


“저항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언젠가는 해야만 할 일들이다.”


사진은 침묵의 표현매체이다. 그러나 말을 못한다는 것이지 말이 없는, 말을 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드러나지 않을 뿐 새기지 못한 것은 아니며, 읽지 못하는 것이지 내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편한 것보다 힘든 것이, 정상적인 것보다 특이한 것이, 평범한 것보다 기이한 것이 사진적이다. 나는 남들과 다른 조건에 있고 싶다. 춥고 바람 불고, 어둡고 힘든 촬영 조건이 나를 더욱 성장시킨다. 그것들을 당연하게 여겼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선택한 사진적 조건 때문에 힘들거나 지루했거나 포기해야 했던 적은 없다.”


“대번에 드러나고, 대번에 알아채는 사진보다 한 겹, 두 겹을 벗겨야 비로소 알아채는 사진이 울림이 크다. 사진의 공명은 숨어 있고, 감취져 있고, 함축될 때 깊어질 수 있다. 가령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울림이 크다. 흑백은 컬러에 비해 큰 비움이 있고, 미니멀 혹은 추상은 현실에 비해 큰 비움이다. 어둠은 밝음에 비해 더욱 큰 비움이다.”


“오래 사랑해야 사진이다. 무엇이든 오래 사랑하는 것이 사진적인 것이다. 무엇이라도 좋다. 어떻게라도 좋다. 그것은 사진작가 저마다의 개성이니까. 그러나 오래 사랑하는 주제, 오래 사랑하는 소재, 오래 사랑하는 대상이 있을 때 사진으로 행복할 수 있다. 사진은 어떤 것과 만나도 상관없다. 어떤 카메라도 상관없다. 다만 주제, 소재, 대상과의 만남이 오래가고 오래 지켜볼수록 깊어지고 의미도 커진다. 그래서 사람도 풍경도 자주, 틈틈이, 규칙적으로 잊지 않고 찾아주는 것이 좋은 것이다.” - 마이클 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