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책 100권 읽기 일흔일곱 번째 책입니다
사진을 찍는 건 나의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읽어주는 것은 카메라다. 카메라는 그래서 너무 멀어도 혹은 너무 가까워도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너무 멀면, 애지중지하느라 내 마음을 보여줄 기회를 놓치게 되고 너무 가까우면, 카메라를 시도 때도 없이 가치 없이 사용해서 정작 중요한 ‘그’ 사진마저 기억해내기가 어려워진다. 그래서 카메라와는 오랜 친구 같은, 그런 사이로 지내는 게 좋다.
언제든 손에 닿을 수 있고, 존재가 전혀 부담스럽지 않으며, 바로 내 눈앞에서 내 마음과 피사체 사이의 거리를 조절해 말과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내 감정을 알아주는 친구. 그것이 카메라일 것이다.
만약 사진을 찍고 싶어 진다면 먼저 내 마음으로 찍은 다음에 카메라로 기록한 뒤 사진으로 그 마음을 꺼내보면 된다. 또, 만약 사진을 잘 찍고 싶거나 혹은 잘 찍는 법을 알고 싶다면 카메라 뒤에 웅크리고 앉아 세상을 보지 말아야 한다.
세상만이 아니라, 세상에 풀어놓은 마음을 보게 해주는 게 카메라다.
나에게 사진은 피사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피사체를 통해 나를 찍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사진가로 살고 있는 나의 현재 진행형인 꿈이자 오래전 사진을 찍어보겠노라고 마음먹었던 스무 살 시절의 꿈이기도 하다.
당시 내 손에는 프로 작가라면 갖춰야 한다고 여겨지는 고가의 장비도, 조명이 잘 갖춰진 스튜디오도 당연히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늘 당당하게 나를 소개했다. 그런 외적인 조건은 앞으로 일하면서 갖추면 된다고 생각했다. 나의 본질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그런 외적인 조건은 필요에 따라 빌려 써도 된다고 생가했다.
중요한 건 내가 나 자신을 컨트롤하는 것이었다. 사진을 한 컷 찍게 될 때 나는 일이 결정된 순간부터 촬영하는 그날까지 온전히 그 사진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 이것에만 몰두했다.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하고 내 신경을 건드릴만한 어떤 상황에도 나를 노출시키지 않았다. 오로지 내 머릿속에는 찍어야 할 사진만이 존재했다. 내가 나를, 빛을 얼마나 잘 컨트롤하느냐, 사진을 찍는 그 순간 몰입해온 생각을 어떻게 구현하느냐, 이것만이 나를 지탱하고 나를 당당하게 하는 유일한 장치였다. 그리고 나는 자신이 있었다. 다른 외적인 조건에 흔들리지 않을 자신. 몰입만 하면, 내가 찍을 수 있는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 그것이야 말로 내가 나로 설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었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구현하는 것이다. 피사체가 존재한다고 하지만 카메라로 그것을 찍는 순간 그것은 나와 피사체와의 교감의 결과를 세상에 만들어 내놓는 일이다.
가끔은 그런 사진이 있다. 당연히 그런 사진은 기술적으로 잘 찍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진이다. 뿐만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공감도 끌어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그 사진은 그냥 의미 없는, 길거리에서 흔히 보는 평범한 사진일 뿐이다. 그렇지만 남들 눈에 평범해 보이는 사진이 오로지 내 눈에만 특별해 보인다.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두 가지를 찍는 것이다. 하나는 당연히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찍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그 마음이 드러내는 것을 찍는 것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 그를 바라보는 나를 찍는 것이다. 공간을 찍는다는 건 사진 기술에 좌우되지 않는다. 찍고 싶은 공간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우선 카메라를 들기 전에 내가 왜 이 공간을 찍고 싶은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건물이 멋있어서, 인테리어가 특이해서, 친구와 놀러 온 곳이라서... 사람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내 눈앞의 대상, 내가 찍는 대상을 보면서 시간을 떠올리곤 한다. 그 대상에게 일어난, 또는 일어날 숱한 시간, 그리고 그 흔적. 사진을 찍는다는 건 그래서 내게는 시간의 흔적을 찍는 것이다. 내 눈앞에 존재하는 공간 속에서 이 사물에 스며들었을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사진을 찍기 전에 내가 하는 일이다. 그 시간을 상상하고 거기에 내 나름의 해석을 더하고 사진에 반영하는 과정은 사진을 찍는 내게 중요하다. 상상은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마음껏 앞뒤의 시간을 자유롭게 넘나 든다.
사진은 빛이 머문 흔적이다. 사진가는 사진을 찍기 전에 빛을 먼저 봐야 한다. 빛은 사진의 분위기를 결정하고 빛에 따라 피사체는 다른 모습이 되기도 한다. 빛은 사진의 모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