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9 -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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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하나모자란천사 코딩교육

 2019년 책 100권 읽기 예순일곱 번째 책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두 번 정도 읽었다. 안평대군은 세종의 아들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서 정작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패자인 안평대군의 역사는 기록에 남은 게 별로 없다. 어쩌면 수양대군(세조)보다도 더 많이 기억되는 왕자가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양대군의 권력 욕심에 의해 안평대군의 전체적인 예술적 재능과 가치는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다. 수양대군 역시 시서화와 음악에 대단한 재능과 공적이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그의 글과 글씨, 그림, 음악의 재능은 안평대군의 재능과 명성에 가려졌고, 삼절, 쌍삼절로 불리는 안평대군 앞에서 그의 재능은 사소하게 보이기까지 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봤을 때 손이 먼저 움직였다. 이유는 6월에 들었던 박성식 교수님의 강연 때문이었다. 그의 강연에서 안평대군의 꿈과 몽유도원도에 대한 설명을 듣게 된 후 조금 더 깊이 알고 싶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지금 일본으로 건너가 덴리 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그림이다. 단순히 꿈을 그린 그림이 아니다. 조선의 수성이라는 대업에 참여한 왕자가 자신의 천명을 보았던 한 편의 꿈을 기록한 그림과 문서였다. 안평대군의 꿈은 현실 정치의 와중에서 좌절됐고, 그는 계유정난(1453년)을 통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후 몽유도원도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이 서화 작품은 약탈당했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300여 년의 세월 동안 비장되어 오던 끝에 메이지 유신이라는 역사의 물결에 떠밀려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1447년(정묘) 4월 20일 밤이었다. 안평대군은 무릉도원을 소요한 그 유명한 꿈을 꾸었다. 이 꿈은 단순한 한 편의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에서 하나의 커다란 사건이었다. 그는 깨어나 곧 화원 안경에게 이 꿈을 그리게 하고, 자신은 꿈꾼 자초지종을 적은 ‘도원기’를 썼으며, 세종조 핵심 문신들에게 수년에 걸쳐 찬문을 받아 ‘몽유도원도’라는 불후의 시서화 작품으로 기록해놓았다.


어딘지 알 수 없는 봄날의 숲 속이었다. 아득히 첩첩 거산의 봉우리가 하늘에 솟아 있고 가까이는 여기저기 복사나무가 한가로이 꽃을 피운 나지막한 야산이 이어져 있었다. 숲 속의 오솔길을 따라 두 사람이 말을 타고 지나고 있었다. 안평대군과 박팽년이었다. 인기척에 새들도 숨어버린 듯 모든 것이 고요한 숲 속을 얼마만큼 가다 보니 오솔길이 끝나면서 갈림길이 나타났다. 그들은 잠시 멈추어 어느 길을 택할까 망설이고 있었다. 그때 소박한 옷을 한 촌부가 그들 앞에 나타나서 깊이 허리 굽혀 한쪽 길을 가리키며 공손히 말했다.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골짜기에 드는데, 그곳이 도원이외다.”


그들은 촌부가 일러준 길을 따라 첩첩 거산을 향해 가파른 산 벼랑을 말을 달려 올라갔다. 울창한 산속의 깎아지른 듯이 험한 절벽을 수없이 돌고 돌아 산꼭대기를 향해 정신없이 오르다 보니 계곡을 따라 세차게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앞을 막았다. 폭포수 곁으로는 굴과 같은 좁은 통로가 나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통로의 안쪽은 깊은 골짜기였는데, 거기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들판은 아늑한 동굴과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한 동리를 이룰 만큼 넓었다. 따뜻한 봄기운에 낮은 구름과 안개가 자욱이 깔린 그 들판에는 온통 복사꽃이 만발해 있었고 봄날의 들판 가득히 감돌고 있는 구름과 안개는 진분홍색 복사꽃 빛을 받아 붉은 노을과 같이 어른어른 피어오르고 있었다.


복사꽃 들판 한가운데로 실개천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강가에는 임자 없는 조각배 하나가 매여 있어 물결을 따라 한가로이 흔들리고 있었다. 실개천 너머로 들판 저 멀리 골짜기 끝에는 푸른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로 희미하게 소박한 집들이 몇 채 보였다. 멀리서 보아도 집들은 퇴락해 보였고 오래전에 인적이 끊어진 듯 깊은 적막감만이 흐르고 있었다.


안평대군과 박팽년은 홀린 듯이 동굴 입구에 멈추어 서서 이 아름답고 신비한 마을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이곳은 정녕 도원이로다!”


안평대군이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때 신숙주와 최항이 불쑥 나타났다. 이들은 안평대군과 박팽년을 뒤따라온 듯했다. 오랫동안 시문을 함께해온 이들 네 명의 지음지기 문우들은 이 무렵 궁중에서 조석을 함께하면 훈민정음의 후속 작업으로 ‘동국정운’ 편찬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전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다시 만난 이들 젊은이들은 반가움에 겨워 서로 옷소매를 부여잡고 흔들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판으로 나섰다.


이들은 복사꽃 가득한 들판을 이리저리 거닐었다. 아름다운 무릉도원의 모습과 도원을 둘러싼 장중한 대자연을 만끽하며 함께 시를 읊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복사꽃 흘러내리는 실개천을 건너 대나무 숲 속 마을로 들어갔다. 여남은 채의 띠를 덮은 소박한 집들은 텅 비어 있고 토담도 무너져 내린 쓸쓸하고 적막한 마을이었다. 인적인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마친 신선의 마을 같았는데, 신선마저도 오래전에 떠나간 듯 그 구구의 자취도 찾을 길 없는 그곳에는 대숲만이 봄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마을을 천천히 돌아 나온 이들 젊은이들은 이윽고 짚신감발을 하고 들판 주변에 병풍처럼 둘러선 거산을 오르내리며 대자연에서 마음껏 놀았다. 그러다 이들은 기암절벽 길을 걸어서 함께 산을 내려왔다.




이 꿈은 또한 현실에서도 일련의 특별한 사건으로 이어졌다. 꿈을 꾼 지 4년 후 그는 북악산 뒤쪽에서 꿈에 본 무릉도원과 흡사한 땅을 발견해 그곳에 별서를 짓고, 무릉도원 계곡의 정사라는 뜻으로 무계정사를 열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무계정사는 그가 반역을 꽤 했다는 증거가 되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이러한 사건의 전개로 볼 때 무릉도원 꿈은 안평대군이 계유정난으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기까지 그의 인생 후반부를 설명하는 단초가 된 것이다.


나는 정묘면(1447년) 4월에 도원 꿈을 꾸었다. 작년(1450년) 9월에 우연히 이곳을 유람하다가 국화꽃이 계곡물에 떠내려온 것을 보고, 다래 넝쿨과 바위를 부여잡고 계곡을 올라가서 보니, 풀과 나무와 물가의 그윽한 모습이 내가 꿈에 본 도원의 모습과 흡사했다. 그래서 금년(1451년) 이곳에서 서너 칸의 집을 짓고 무릉계곡의 뜻을 취하여 ‘무계정사’라 했다. 이곳은 진실로 정신을 편안케 하는 은자의 땅이로다. 이에 잡영시 다섯 편을 지어 찾아와 묻는 자들에게 대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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