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ly Life

10년만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다

하나모자란천사 2019. 3. 29. 13:17

2019년 3월 18일 월요일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거의 10년 만에 다시 이곳을 찾았다. 작년부터 두 아이들과 함께 천왕봉에 오르려고 생각했으나 기회가 되지 않았다. 작년 가을쯤에 둘째 아이와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 이곳을 찾았으나 전날 내린 비로 인해 계곡이 넘쳐서 입산이 통제되어 입구에서 되돌아 갔었다. 다시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리산 천왕봉을 종종 올랐다. 북한을 제외한 내륙에서 가장 높은 산이기도 하고, 천왕봉 표지석 뒤의 글귀 때문이기도 하다. 천왕봉 표지석의 뒤에는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실제로 지리산의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곳이다.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면 보이지 않는 내면의 힘을 얻는 것 같다.




이번 지리산 산행에도 의미를 두었다. '리셋'의 의미다. 10년 동안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 같다. 그 길이 올바른 길인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려왔는데 잘못된 길을 걸어온 것 같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몸도 마음도 리셋하고 싶었다. 나의 체력도 확인하고 싶었다. 힘들게 정상에 올랐다. 기쁘다.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있는 산행이었다.



천왕봉 정상에서 한국인의 기상을 가슴속에 가득 담아서 내려왔다. 이제 홀가분하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아직 늦지 않고 다시 시작해도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다.



최근 며칠 동안 미세먼지로 날씨가 좋지 않았는데 지리산은 10년 만에 다시 찾은 나를 배척하지 않고 반겨주었다.



산행을 시작하면서 박경리 작가의 '토지'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소설의 무대가 경상도 하동 땅 평사리이지만 소설 속의 인물들의 활동 무대를 놓고 보면 지리산 자락이 실질적인 배경이다. 민족의 한이 서려 있는 곳 이곳 지리산이다.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바로 이 글귀 때문이다.


韓國人의 氣像이 여기서 發源되다



당일치기로 지리산 천왕봉을 오를 때 대부분 중산리 탐방로를 시작으로 산에 오른다. 예전에 이용했던 코스는 '중산리 탐방로 - 법계사 - 천왕봉'으로 올라서 장터목 대피소를 둘러 다시 원점 회귀하는 코스를 이용했다. 이날은 상황에 따라 장터목을 찍고 내려오거나 아니면 다시 올랐던 길로 되돌아 올 계획으로 산행을 시작했다.



보통 지리산 천왕봉의 산행 시간은 8시간으로 잡는다. 때문에 해가 긴 하절기가 아닌 경우 5시 이전에 하산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산에 올라야 한다. 집에서 7시쯤 출발해서 8시쯤 중산리 탐방로에 주차 후 산행을 시작했다. 지난가을 이곳을 찾을 때 주차장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공사가 완료되어 무인 정산 시스템이 도입되어 있다. 하루 주차비는 4,000원이고 카드결제도 가능하다.



중산리 탐방지원센터에서 순두류(경상남도 자연학습원)까지 버스를 이용해서 산행을 시작할 수 있다. 거리는 600 미터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급경사 구간을 피해서 걸을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왔다면 아마도 이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이번 산행에 다른 의미를 두었기에 나는 중산리 탐방지원센터에서부터 산행을 시작했다. 통천길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칼바위를 지날 무렵 점퍼를 벗었다. 전화기를 바지 주머니로 옮기면서 트래킹 앱인 루가를 실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칼바위에서 루가를 실행시켰다. 



칼바위가 있는 곳이 해발 800 미터다. 중산리 탐방로에서부터 시작하면 실제 지리산은 1,200 미터를 올라야 한다. 산행 중 오르막 구간과 내리막 구간을 포함하면 실제 상승고도는 1,470 미터 정도다. 산행 후 루가 앱의 트래킹 내역을 토대로 산출된 내역이다.



출렁다리까지는 동네 뒷산에 오르는 수준이다. 저 다리를 건너가면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갈림길이 나온다. 지금까지 나는 로터리대피소(법계사)를 경유하여 천왕봉으로 오르는 코스를 선택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단 이 구간은 처음부터 돌계단을 만난다. 법계사에 오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상승구간이다.



10년 만에 지리산을 찾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산행을 했었기에 첫 진입 구간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의 상승각은 다른 곳도 많기 때문이다. 다만 지리산 천왕봉은 계속해서 이런 구간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처음부터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한다.



칼바위(해발 800 미터)에서 시작한 산행이 이내 해발 1,129 미터가 되었다. 그만큼 상승각이 높다는 의미다.



급경사 지역이므로 무리한 산행을 자제하라는 안내 문구와 함께 심장마비 사망사고 지역이라고 알림 표지가 붙어 있다. 괜스레 걱정을 해 본다.



처음 급경사 구간을 오르면 망바위가 나온다. 순식간에 이곳에서 처음으로 휴식을 취했다. 배낭을 풀지는 않았다. 배낭을 풀고 편안하게 쉴 곳은 로터리대피소다.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잠깐 쉬면서 물을 마시며 갈증을 풀었다. 3월 중순이 지났음에도 해발 1,100 고지부터는 곳곳에 눈이 녹지 않은 상태로 있었다.



망바위에서 법계사까지는 그나마 완만한 상승각이다. 등산로도 잘 조성이 되어 있다. 쉬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부지런히 걸었다. 예상보다 30분 빨리 로터리대피소에 도착했다. 평일이라 등산객이 많지 않았다. 주말이면 편하게 쉴 공간을 찾아야겠지만 평일이라 비어 있는 평상이 많았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준비해 간 김밥 한 줄을 꺼내 먹었다. 8시쯤에 중산리 탐방로에서 산행을 시작해서 10시가 되기 전 이곳 로터리대피소에 도착을 했다. 오래 쉬지 않았다. 10년 만에 오르는 산행이라 마음이 급했다. 지금까지 올랐던 페이스라면 12시쯤이면 전왕봉에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법계사는 입구에서 사진 한 장만 남겼다.



겨울이 나고 눈이 녹았다. 때문일까 예전 지리산에 올랐을 때는 다람쥐를 많이 보지 못했는데 이날은 다람쥐를 꽤 많이 만났다. 아마도 눈이 많이 녹은 등산로 주변으로 먹을 것을 찾아 나온 녀석들이 아닐까 싶다. 그중에 한 녀석은 이렇게 포즈까지 취하고 경계심이 없어서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해발 1,500 미터 구간이 지나자 등산로 곳곳에 눈이 녹지 않고 있었다. 아이젠 없이도 등산을 할 수 있는 수준이지만 카메라 때문에 스틱 없이 산행을 하고 있어서 미끄러질까 긴장이 되고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때문이었을까 해발 1,700 미터 구간인 개선문을 지나면서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초반에 너무 오버페이스를 한 탓도 있었다.



이제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 아래로 내려다 보인다. 나와 거리를 두고 청년으로 보이는 4명의 남녀가 산에 오르고 있었는데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얘기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법계사를 지날 즈음에 추월을 해서 내가 앞장섰는데, 포기하고 내려간 것 같다. 지금부터는 혼자 외로운 싸움이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 걸음, 한 걸음이 너무 힘들고 무겁다. 산행하면서 좀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추월을 당하지 않는데 한 팀에게 추월을 당했다. 무리하지 않았다. 갈증을 고드름으로 해소할까 생각했으나 참았다.



비목이다. 눈발이 서려 있는 비목을 보고 싶었으나 때가 너무 늦었다. 올해는 글렀다. 내년에는 덕유산 겨울 산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나이 때문인가 예전에는 듣지도 았았던 가곡이 듣고 싶다. 혼자서 흥얼거려 본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마지막 데크 계단을 힘겹게 오르고 드디어 지리산 천왕봉 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표지석을 보고 나니 없었던 힘이 다시 생겨났다. 



평일이라 사람이 거의 없어서 편하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고마웠다. 예상했던 12시는 넘겼지만 12시 20분쯤에 지리산 천왕봉 정상에 올랐다. 기뻤다. 물로 목을 축이고 잠깐 휴식을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하산을 생각했다. 초반에 오버페이스와 겨우내 산행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천왕봉에 오른 것이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장터목을 찍고 하산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올랐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코스를 잡았다. 곳곳에 눈이 남아 있고 아이젠도 스틱도 없는 상황임으로 천천히 조심해서 걸었다.



중산리 탐방로로 복귀했다. 다 내려와서 너무 힘들었다. 처음 산행을 시작할 때 8시에 출발했으니 8시간을 잡고 늦어도 오후 4시까지는 내려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중산리 탐방로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3시 20분쯤이었다. 


루가 앱을 이용하면 산행 기록을 데이터로 분석해서 준다. 시간을 기록할 필요도 없고, 거리를 계산할 필요도 없다. 편하다. 다만 LG U+ 통신사의 문제로 산 중에서 GPS 정보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다음에는 LG U+를 사용하지 말아야겠다.


이로써 내 체력을 확인하는 두 번째 성과도 얻었다. 아직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는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매일 이곳을 오르는 이도 있지만 나에게 지리산 천왕봉은 특별한 의미다. 내 기준에서 만족하면 된다. 다음에는 두 아이들과 함께 이곳에 오를 생각이다. 무엇보다 회사를 옮겨서 새롭게 시작하는 시점에서 모든 것을 리셋하고자 오른 산행이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 좋았다.